현실적인 것이 반드시 좋은 건 아니다 – 고독한 늑대의 온천 기행 쿠사츠・만자 편
아마도 온천을 싫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일반적인 뜨거운 물과 뭐가 다를까 싶기도 하지만, 온천에 몸을 푹 담그면 피로가 싹 풀리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도 온천을 표방하는 곳이 있으나, 일본에 비하면 규모나 콘셉트가 많이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한국의 온천은 종합 스파 시설에 가까워서 자연 속에서 온천을 즐기기엔 부족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어디에서나 가까운 온천 관광지에서 자연 속 온천욕을 즐길 수 있다. 실제로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을 보면 온천 장면은 꼭 한 번씩 등장한다. 심지어 일본이 아닌 이세계 배경 작품에서도 온천에 가는 장면이 나올 정도니, 일본인의 온천 사랑은 인정해야 한다. 뒤집어 말하면, 이러한 온천 입욕 문화가 일본에서는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일본의 온천 사랑을 전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있다. ”고독한 늑대의 온천 기행“(이하 온천 기행)은 일본에 실제로 존재하는 온천 지역을 하나 선택해, 그곳을 소개하며 인물들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작품이다. 한국 기준으로 2024년 초에 1편이 번역되어 나왔고, 2025년 초에 2편이 번역되었다. 오늘은 그 1편인 ”온천 기행 쿠사츠&만자 편“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솔직히 말하면 이 작품은 우리 서클이 만들어지기 전, 서클 명의가 아닌 개인 명의로 작업한 타이틀이다. 탐라에서 우연히 보인 비주얼과 소개 문구를 보고 ”이건 재미있겠다!“라고 생각해 번역 의뢰를 보냈고, 원작자분이 검토 후 한국어 번역을 맡아주었으면 좋겠다고 답변해 주셨다. 그때는 아직 몰랐다. 이 작품이 그렇게 어려울 줄은…
앞서 말했듯 ”온천 기행“ 시리즈는 도쿄의 한 Ai 로봇 제조 업체에서 근무하는 수컷 늑대 수인 시키시마 코우지가 온천 여행을 떠나며 여러 사람과 만나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성인용 작품이다. 주인공 시키시마는 덩치에 맞지 않게 수동적인 인물로 그려지며, 그래서 여행 과정에서 늘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 온천 기행 1편의 또 다른 주인공은 같은 회사 직속 후배인 말 수인 이타쿠라 켄토다. 둘은 잦은 야근으로 지쳐 남은 연차를 빨리 쓰라는 압박을 받고, 평소 여행을 좋아하던 이타쿠라는 선배 시키시마에게 연차를 함께 쓰고 피로도 풀 겸 온천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다. 그렇게 향한 곳이 이타쿠라의 고향이자 일본에서 유명한 온천 관광지 중 하나인 ”쿠사츠 온천“이다.

온천 기행은 실제 지역을 기반으로 한 비주얼 노벨로, 목욕탕 내부 등 촬영 불가능한 장소를 제외하고는 원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으로 배경이 구성되어 있다. 1편에 등장하는 히가시나카노 지역, 신주쿠역, 신주쿠 버스터미널 등은 실제와 동일한 구조라서 캐릭터들이 현실에서 살아가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작품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여행지에 가기 위해 어떤 절차로 예약하고 어떤 버스를 타야 하며, 그 버스가 어느 고속도로를 지나고 어떤 지역을 통과하는지까지 글과 사진을 곁들여 상세히 보여준다. 번역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도 이 지명 관련 설명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일본 지명이 나올 때마다 해당 발음과 정보가 맞는지 계속 조사해야 했기 때문이다. 원작가가 꼼꼼히 검수해 틀린 내용은 없겠지만, 온천 기행 1편만 참고해도 여행 계획을 충분히 세울 수 있을 정도라 번역자가 틀린 정보를 전달하면 누군가에게 피해가 될 수도 있었다.

온천 기행이 다른 수인 비주얼 노벨과 차별화되는 점은, 단순히 온천 여행지나 일본 문화를 소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제법 현실적인 캐릭터와 고민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서브컬처 작품들은 캐릭터성을 극대화해 이야기를 끌어가는 경우가 많아, 결국 스토리보다 캐릭터성만 남아 2차 창작만 이루어지는 작품도 적지 않다. 이것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온천 기행은 캐릭터성보다 현실성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30대가 되어가는 두 주인공은 저마다 고민을 안고 있다. 늑대 수인 시키시마는 굼뜨고 눈치가 좋지 않은 성격 탓에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할 기회를 번번히 놓쳤고, 결국 서른이 다 되도록 연애 경험이 없다는 걸 컴플렉스로 지닌다. 작중에서도 부모님이 이제 여자친구를 사귀라고 말한다고 하는데, 30대 남성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말이다.
한편 말 수인 이타쿠라는 동성애자로, 묘사를 보면 제법 방탕(?)하게 노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직속 선배인 시키시마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 “조금 더 자유를 느끼고 싶으니 지금은 연애를 하고 싶지 않다”라는 대사를 봐도 풍부한 연애 경험과 여유, 이타쿠라의 성격이 드러난다.

둘은 함께 여행하며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고, 이타쿠라는 시키시마에게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한다. 시키시마는 이타쿠라를 이해해주고, 이타쿠라는 시키시마의 고민을 해결(?)해주겠다고 나서며 둘은 뜨거운 밤을 보낸다. 이 과정이 여타 성인용 비주얼 노벨과 달리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시키시마는 지금까지 자신의 성정체성을 일반으로 생각해왔으니, 이타쿠라 제안을 듣고 당연히 망설인다. 하지만 서른이 다 되도록 동정이라는 컴플렉스를 해소할 기회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중 시키시마는 이타쿠라 제안을 듣고도 말을 얼버무리거나 괜히 시간을 끄는 등 갈등한다. 결국 결심한 두 사람은 다음 날 아침 아무렇지도 않게 친구처럼 여행을 이어가고, 시키시마는 작품 마지막에서 ”내가 몰랐을 뿐이지 이런 삶의 방식도 선택할 수 있겠다“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러나 세밀한 현장 묘사, 공감할 만한 감정선, 현실적인 고민과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를 내건 작품인 만큼, 한계도 명확하다. 우선 배경 묘사가 걸림돌이다. ”쿠사츠“가 온천 지역으로 유명한 건 온천을 좋아한다면 누구나 알 수 있겠지만, 여행객에게는 난도가 높은 장소다. 그런데 그 온천으로 가는 길, 산 이름, 장소 이름뿐 아니라 유래까지 과하게 알려주는 경향이 있다. 이야기의 절반은 이런 배경 설명에 할애했다고 봐도 될 정도다. 한국에서는 “쿠사츠 PPL 소설”이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니, 일본 여행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보면 “그래서 뭐?”라는 말이 나올 만하다.

또한 이 “현실성” 때문에 성인용 게임인데도 성인용 장면이 턱없이 부족하다. 중간중간 상상력을 자극하는 장면과 묘사는 등장하지만, 직접적인 장면은 전체의 5~10%도 되지 않는다. 그마저도 “현실성”(?)을 이유로 길지 않고 간략히 묘사되며, 자극적인 부분이 없어서 이를 기대하고 온 사람은 당황하게 된다. 성인용 장면이 단순 소비가 아니라 이야기 흐름에 관여한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지만, “성인용” 게임으로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하나의 문제는 플랫폼과 가격이다. 원작자가 게임이 아닌 ”소설(노벨)“로 즐겨주길 바라는 의지 때문에 이 작품은 스팀이 아닌 부스(BOOTH)와 DLSite에서 판매된다. 그러나 둘 다 일본 외에서는 생소한 플랫폼이며, 특히 DLSite는 여러 이슈로 카드 결제까지 불가능해졌기에 한국 플레이어는 부스(BOOTH)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스팀을 포기한 시점에서 한국에서는 홍보와 입소문에 의존해야 하는데, 스팀이었다면 조금 더 많은 사람이 즐길 기회가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크다. 분량 대비 가격도 아쉽지만, 음악이 모두 오리지널 작곡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또 그렇게 비싸다고만 할 수도 없다. 하지만 플레이어에게 중요한 건 콘텐츠 체험이고, 뒷사정은 중요하지 않다. 플랫폼과 가격이 마니악한 내용과 맞물리며 크게 퍼지지 못했다는 게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이다 (물론 이 아쉬움은 2편의 충격(?)적인 내용으로 어느 정도 해소된다).
“온천 기행” 1편은 확실히 한국인이 즐기기엔 허들이 높은 작품이다. 성인용 작품을 기대하고 온 사람은 적은 성인용 장면에 아쉬움을 느낄 것이고, 일본 지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과도한 정보 제공에 지루함을 느낄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은 “수인”과 “여행하는 재미”를 즐기는 한정된 사람에게 크게 어필하는 작품이 된 셈이다. 그래도 이런 장르의 다양성은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수인 비주얼 노벨에도 장르의 폭을 넓히는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온천을 가기 힘들다면 이 작품을 통해 여행의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다음에는 시간을 내어 작품에 묘사된 루트 그대로 쿠사츠 온천을 즐겨보고 싶다. 어쩌면 시키시마나 이타쿠라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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